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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박영우의 스포츠시야

19년전 9월, 힘들었던 국민들을 일으킨 한국 야구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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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3-1로 꺾으며 동메달을 확정지으며 기뻐하는 선수들/사진 캡처=KBSNSports


박찬호, 김병현 등의 부재에도 불구
네덜란드, 이탈리아 꺾고 3,4위전 일본에 승리
 
한국 야구 역사상 첫 올림픽 메달이자
한국 구기종목 전체 첫 메달
 
1997년부터 찾아온 한국의 IMF 외환 위기로 온 국민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던 2000, 8000 Km 떨어진 시드니에서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한민국 올림픽 야구대표팀이 3,4위전에서 최대 라이벌인 일본을 꺾고 메달을 획득 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에 온 국민들은 들썩였고 메이저리그 3인방(서재응, 박찬호, 김병현)이 없는 어려운 여건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희망을 남겨 주었다.
 
이는 한국 야구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획득이자 1948년 대한민국의 올림픽 참가이래 첫 구기종목 메달 획득이다.

 

 

3,4위전 일본과의 경기에 등판한 구대성/사진 캡처=MBC ESPN

 

 

대표팀이 메달을 따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다. 예선 첫 경기에서 선발투수 임선동에 이어 마운드에 올라온 박석진의 호투로 이탈리아에 10-2로 승리했지만 쉽게 이길 것으로 예상되던 호주 전에서는 송진우가 블론세이브를 하며 3-5로 패했다.

 

사기가 하락한 한국 대표팀은 강호 쿠바와의 3차전에서 박재홍이 동점홈런을 치는 등 막상막하의 모습을 보였지만 중요한 순간 허용한 역전홈런을 만회하지 못하면서 6-5로 패하고 말았다.

 

마이너 선수로만 구성되었지만 강력한 우승후보인 미국과의 4차전에서도 0-4로 패하면서 한국 대표팀은 남은 세 경기 중 한번이라도 패하면 탈락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었다.

 

5차전 상대는 네덜란드로, 한국에게 패배를 안긴 쿠바와 호주를 잡은 팀이었다. 하지만 당시 선발투수였던 박석진이 8이닝동안 무실점 호투를 펼치며 1회에 나온 두 점의 선취점을 지키며 승리하였고 3개의 고비 중에서 한 고비를 잘 넘어 갔다.

 

한국 대표팀의 6차전 상대는 최대 라이벌 일본이었다. 일본은 선발투수로 괴물 투수로 불리던 마쓰사카를, 한국은 당시 국내 최고의 투수 중 하나인 정민태를 내세웠다.

 

뛰어난 투수들이 마운드에 오른 만큼 팽팽한 투수전이 되리라는 예측은 1회부터 빗나갔다. 정민태는 1회에만 4실점을 하며 흔들렸고 마쓰사카 역시 2실점을하며 좋은 출발을 보이지 못했다.

 

정민태는 이후 6회까지 추가 실점 없이 마운드를 구대성에게 물려줬지만 마쓰사카는 9회까지 3점을 더 실점하고 연장 10회에 내려왔다.

 

결국 10회 초 터진 홍성흔의 적시타와 정수근의 희생플라이로 2점을 따냈고, 9회말 2아웃부터 마운드를 지키던 진필중이 1실점으로 이닝을 마치며 한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 사이, 한국과 준결승 진출을 노리던 호주가 이탈리아에 패하면서 한국의 준결승 진출이 확정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올림픽 본선 최약체팀인 남아공을 만났고, 3-13 콜드게임을 만들어 내며 1 3패라는 탈락위기의 상황에서 3연승으로 3위를 기록하며 준결승에 오르게 되었다.

동메달에 기뻐하는 선수단과 김응룡 감독/사진=[한국야구100년사]

 

 

한국은 예선 4차전에서 무기력하게 패했던 미국과 준결승 경기를 갖게 되었다. 이번 경기에서도 쉽게 패할 것이라는 관측과 달리 상당히 팽팽하게 진행이 되었고 3회에는 한국이 먼저 2점을 뽑아냈다.

 

그러나 7회말 미국의 공격에서 명백한 아웃을 세이프로 선언하는 두번의 아쉬운 심판 판정으로 동점을 허용하였고, 9회말 구대성이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결승의 문턱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때의 판정은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논란이 있을 정도로 명백한 오심이었고 지금까지도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오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아쉬움도 잠시 동메달 결정전에서 또 다시 숙적 일본을 만나게 되었다. 일본은 예선 전과 같이 마쓰사카를 마운드에 올렸고 한국은 구대성을 선발투수로 등판시켰다.

 

이번에는 타이트한 투수 전 이었다. 양 팀 모두 7회까지 단 한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8회말 한국 공격에서 박진만의 내야안타 이후 이병규가 2루수의 실책으로 출루한 상황에서 이승엽이 타석에 들어섰다. 이날 이승엽은 3타수 무안타 3삼진으로 상당히 부진했다.

 

하지만 이승엽에게는 한 방이 있었다. 마쓰사카의 실투를 놓치지 않고 좌중간으로 뻗어가는 2루타를 쳐내면서 두명의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김동주가 적시타를 쳐내며 이승엽 마저도 홈으로 불러들이며 3점차 리드를 만들어 냈고, 계속된 호투로 마운드를 지켰던 구대성이 9회를 1점으로 틀어막으며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때 보여준 국제대회에서의 한국야구의 위상이 2002 아시안게임 우승과 2006WBC 4, 그리고 2008년 올림픽 금메달까지 이어졌고, ‘약속의 8라는 한국대표팀의 유행어와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인 이승엽을 만들어 낸 중요한 대회가 되었다.

 

최근 프로야구의 경기력이 저하되었다는 기사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각종 사건사고뿐 아니라 소위 '거품'이 낀 선수시장에 과거의 영광에만 취해 안이한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선수뿐 아니라 야구계 관계자들 모두 비판을 곱씹고 변화를 생각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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